퀄컴과 인텔·AMD가 생산하는 ‘노트북 칩’에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설계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양쪽이 사용하는 ‘명령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분야에서의 ‘명령어 집합’은 이를테면 군대에서 손동작을 통해 작전에 필요한 의사소통을 하는 ‘수신호 체계’와 비슷한데요. 병사들에게 ‘이동’, ‘정지’ 등을 지시하기 위해 사전에 수신호 체계를 만들어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컴퓨터는 사용자의 명령을 받아서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기억장치(메모리),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하드웨어를 질서정연하게 잘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명령어’를 정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정해둔 명령어들의 모임을 바로 ‘명령어 집합’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퀄컴과 인텔·AMD 양 진영간 결정적인 차이는 이 ‘명령어 집합’이 얼마나 많은 복잡하고 많은 명령어를 포함하느냐에 따라 구분됩니다. 만약 군대의 수신호 체계의 신호 종류가 많고 복잡하다면, 지휘관의 다양한 명령을 손짓 한번에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많은 명령을 기억하고 수행해야하는 병사들은 ‘두뇌(칩, 프로세서)’가 뛰어나야 되겠죠. 반면에 수신호 체계가 단순하다면, 지휘관이 복잡한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여러 번 손짓을 동원해야 할 겁니다. 반면에 병사들의 ‘두뇌’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도 작전을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셨나요? 이 차이가 바로 퀄컴의 설계와 인텔·AMD의 설계가 다른 부분입니다.
이때 ‘복잡한 수신호 체계’에 해당하는 게 인텔·AMD가 채택한 ‘x86’ 설계(아키텍처)이며, ‘간단한 수신호 체계’에 해당하는 게 퀄컴이 채택한 ‘ARM’ 설계(아키텍처)로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기존 컴퓨터가 채택한 x86 아키텍처는 ‘복잡하고 많은 명령어(CISC)’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지휘관)이 비교적 간단하게 하드웨어(병사들의 두뇌)에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하드웨어에 대한 부담이 더 큽니다. 이같은 부담은 발열, 전력소모 증가로 이어지지만, 복잡하고 신속한 작업에 유리합니다.
반면에 ARM 아키텍처는 ‘간소화된 명령어(RISC)’로 구성됐기 때문에, 프로그램(지휘관)이 명령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반대급부로 하드웨어(병사들의 두뇌)에는 부담이 작고, 이는 하드웨어 발열, 전력소모가 줄어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대신 상대적으로 복잡한 대규모 컴퓨팅 작업에는 열세를 보이죠.
그렇기에 x86은 주로 데스크톱 PC 등 기존 컴퓨터를 지배하는 설계(아키텍처)가 되었고, ARM은 스마트폰의 확산과 함께 신흥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잘 이해하셨다면, 왜 x86이 지배하고 있는 노트북 시장에 ARM이 자꾸 문을 두드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휴대용 기기의 특성 상 배터리 소모속도, 즉 전성비에 있어 ARM 아키텍처가 상당한 강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텔·AMD의 철옹성 같은 아성
문제는 수십 년간 인텔과 AMD는 노트북과 데스크톱 시장의 ‘기본값’이었다는 점입니다. 기업용 소프트웨어, 게임, 그래픽 툴 등 대부분의 응용 프로그램이 x86 아키텍처를 전제로 만들어져 왔습니다. 덕분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별도의 고민 없이 인텔·AMD 기반 노트북을 구매해도 모든 프로그램이 문제없이 작동했습니다.
게다가 제조사 입장에서도 이미 수십 년간 최적화된 부품·드라이버·호환성 생태계가 완성돼 있기 때문에, 새로운 아키텍처로 옮겨가는 것은 큰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노트북 CPU 시장은 인텔·AMD의 ‘양강 구도’를 유지하고 있죠.
그렇다면 ARM은 어떻게 PC 시장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을까요? 전환점은 애플이었습니다. 애플이 자체 개발한 ARM 기반 M1·M2·M3 칩을 맥북에 적용하면서, ARM 기반 칩도 고성능과 전력 효율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겁니다. 배터리 사용 시간은 늘어나고, 발열은 줄어들었는데 성능은 오히려 이전 인텔 기반 맥북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이와 같은 ‘ARM 이주’가 가능했던 건, 애플이 폐쇄적인 자체 하드웨어, 자체 운영체제(OS)를 통해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주도권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플이 ARM 칩을 도입한 맥을 내놓고 차츰 기존 하드웨어 지원을 종료해 가면,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좋든 싫든 ARM 맥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를 출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 맥 이용 고객층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와 같은 성공을 퀄컴이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퀄컴은 지난해부터 노트북용 칩셋 ‘스냅드래곤 X 엘리트(Snapdragon X Elite)’를 발표하며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레노버 등 글로벌 PC 제조사들과 함께 ARM 기반 노트북을 하나둘 내놓고 있지만 초기 시장의 반응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소프트웨어 호환성이었는데요. 윈도우와 주요 PC 프로그램 대부분은 여전히 x86을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기초 설계부터 다른 ARM 기반 노트북에서는 가상으로 x86 환경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구동시키는 ‘에뮬레이션’이 필요한데, 당연히 직접 구동하는 것과 달리 이 과정에서 성능 손실이 불가피합니다.
또한 개발자 입장에서도 ARM 플랫폼에 맞춰 따로 최적화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생태계가 충분히 크지 않다면, 소프트웨어 공급자가 ARM을 우선 고려할 유인이 크지 않습니다. 인텔·AMD가 수십 년간 쌓아온 ‘호환성과 안정성의 신뢰’를 단기간에 뛰어넘기는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퀄컴은 삼성전자 갤럭시 시리즈 등 모바일 시장에서의 영향력과, 주요 PC 제조업체·소프트웨어 업체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끊임없이 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당장 노트북은 운영체제만 해도 윈도우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 또한 사실 기존 윈도우가 아닌 ‘윈도우 온(on) ARM’이 필요합니다. 윈도우를 개발하는 마이크로소프트와의 협력이 불가피하죠. 또 컴퓨터 작업·창작 툴은 기기 성능에 많은 영향을 받는 만큼, ‘에뮬레이션’ 방식이 아닌 직접 구동(네이티브)이 가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꽤 어려운 요건이지만, 퀄컴 CEO는 신제품 발표회에서 어도비 CEO와 함께 대담하는 코너를 열고 “행사장에서 포토샵이 스냅드래곤 X 엘리트 노트북에서 구동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밝히기도 했죠.
퀄컴이 이 분야에 뛰어든 시기와, 인텔 기반 노트북의 전성비(소비전력 대비 성능)가 눈에 띄게 좋아진 시기가 겹친 점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x86 진영에서는 새로운 도전자가 출현해서, 졸지에 ‘안드로이드 vs iOS’ 마냥 진영 대결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인 셈이라, 부랴부랴 전성비에 초점을 맞췄는지도 모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표현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소프트웨어 호환성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면 ARM 기반 윈도우 노트북 특히 퀄컴 칩을 탑재한 노트북은 충분히 위협이 될 겁니다. 실제로 가트너와 같은 시장조사기관에서는 올해만 해도 ARM 노트북이 24% 가량의 점유율을 차지할 거라고 전망하기도 했고요.
아무튼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런 퀄컴과 ARM의 행보를 응원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경쟁이 있어야 결국 소비자가 싼 값에 좋은 물건을 구매할 수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