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PC CPU의 제왕이었지만 최근 몇 년간 주춤했던 인텔, 그리고 GPU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엔비디아가 뭉쳤다는 소식은 가볍게 취급할 사안이 아닙니다.
엔비디아는 인텔에 약 50억 달러를 투자하며, 단순한 자금 지원이 아니라 CPU와 GPU를 칩렛 형태로 결합한 차세대 SoC를 함께 개발하기로 했죠. 한때 인텔 아크 그래픽카드를 출시하며 독자 행보를 걸으려던 시절도 있지만, 최근 CPU, GPU, 파운드리 등 다방면의 사업 부진으로 인해 위기를 맞으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즉 인텔이 엔비디아의 영향력 하에 일부 종속되는 그림이라는 건데요.
그럼에도 CPU에서 한때 가장 존재감이 컸던 회사와, GPU 분야의 절대 강자의 결합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조합은 AMD가 오랫동안 자랑해온 CPU+GPU 통합 전략(APU)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그림이 나옵니다. 컴퓨팅 시장에서 CPU, GPU로 인텔, 엔비디아와 동시에 경쟁할 수 있는 회사는 AMD밖에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인텔에 밀려서 위기에 빠졌던 AMD에게 탈출구를 제공한 것은 콘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5에 탑재된 APU였습니다. 최근 각광받는 '휴대용 게이밍 PC(핸드헬드)'에서도 AMD APU는 상당히 강세를 보이고 있죠. 하지만 엔비디아와 인텔이 협력해 차세대 SoC를 내놓기 시작하면 이 강세는 상당히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AMD 입장에서는 APU가 더 이상 강점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죠.
엔비디아-오픈AI 빅딜, AI 지형 흔든다
물론 시장 규모로 봤을 때는 AI가 더 큰 문제입니다. 엔비디아는 오픈AI에 최대 1,000억 달러 투자를 발표했습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오픈AI가 앞으로 세울 10GW 규모 AI 데이터센터에 엔비디아 GPU를 수백만 개 투입한다는 것.
AI 시대를 연 챗GPT와 오픈AI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엔비디아의 행보는 사실상 “AI 인프라의 (서방세계)표준은 엔비디아”라는 공식을 못박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화웨이나 알리바바 등에서 자체 AI 칩을 활발하게 개발해 경쟁 상대로 치고들어오는 동시에, 중국 정부의 견제를 받다 보니 엔비디아가 위기감을 느꼈을 거라는 진단도 나오고요. 오픈AI 또한 구글 제미나이 등 AI 후발주자의 강력한 추격에다, 최대 투자사였던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관계도 악화되면서 점점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던 와중에 빅딜을 통한 '총알(자금)'과 인프라를 확보하고자 한 조치로도 해석됩니다.
'엔비디아-인텔' 동맹과 '엔비디아-오픈AI' 동맹 모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위기감'이라고 해도 좋을 테고요.
하지만 더 큰 시련은 AMD에게 찾아왔습니다. AMD의 인스팅트 AI 가속기(MI300 시리즈 등)는 이제 막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려는 단계였거든요. 하지만 오픈AI 같은 대형 수요처가 엔비디아에 '올인'한다면, AMD의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엔비디아·AMD 소프트웨어 생태계 격차(CUDA vs ROCm)는 여전히 크죠. 이 둘은 비유하자면 스마트폰에서의 iOS와 안드로이드의 관계와도 흡사한데요. iOS와 CUDA가 모두 하나의 기업에 종속된 소프트웨어 생태계라면, 안드로이드와 ROCm은 외부에 열려 있는 생태계라는 거죠. 차이점이 있다면 CUDA의 점유율이 AI 시장의 90%에 가깝다는 것이고, ROCm은 오픈소스를 표방했음에도 AI 시장에서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글, 아마존과 같은 빅테크는 아예 독자 AI 칩을 만들어 필요 수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노선을 틀었고요.
이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저번주 엔비디아-인텔, 이주 엔비디아-오픈AI 협력 발표 직후, 인텔이 약 20%, 엔비디아가 4% 가량의 주가 상승을 기록한 반면, AMD 주가는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NH투자증권 등 증권가에서도 "AMD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했고요.
엔비디아가 인텔과 오픈AI를 통해 하드웨어-데이터센터-소프트웨어 생태계를 한 줄로 꿰는 그림을 그리면서, AMD는 오랫동안 자랑해온 CPU+GPU 전략도, AI 데이터센터용 GPU도 모두 위협받는 위치에 섰습니다. 어쩌면 향후 몇 년이 바로 AMD에게 가장 큰 시험대가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