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이 현재 시장에서 가지고 있는 입지를 살펴보려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화폐의 발전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적으로 요약하면, 화폐의 발전에는 두 가지 뚜렷한 방향성이 존재하는데요.
우선 첫째로, 화폐는 거래하기 용이하도록 발전해왔습니다. 화폐는 금속 주화에서 종이 지폐로, 그리고 디지털 결제 수단으로 점점 더 다루기 편하게 바뀌었죠. 현대 사회에 와서는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등 각종 ‘페이’가 편리함을 무기로 시장에 자리잡는 것을 보면 이 편리함이 얼마나 강력한 화폐의 발전 동력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향성은, 화폐가 ‘내재 가치가 있는 것’에서 ‘내재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발전한다는 점입니다. 금으로 만든 주화는 당연히 종이 지폐보다 ‘내재 가치’가 높습니다. 금으로 만든 주화는 국가가 망해도 언제든지 녹여서 다른 형태로 사용할 수 있죠. 하지만 ‘내재 가치가 없는’ 종이 지폐는, 발행한 국가가 망하면 때때로 휴지조각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화폐가 ‘내재 가치가 없는 것’으로 진화해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화폐의 신용을 ‘내재 가치’로 보장하는 것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금으로 만든 주화에 적힌 가격보다 금 가격이 높아지면? 사람들은 주화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녹여서 판매하려 들겠죠. 그게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주화보다 재료가 더 비싸니 국가는 주화를 만들 때마다 손해를 보게 되고요. 다들 그렇게 움직이면 시장에 화폐는 점차 줄어들 테고, 결과적으로 경제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국가가 신용을 보장하는 대신, ‘내재 가치가 없는’ 화폐를 운용하는 건 위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마저도 처음에는 국가가 화폐를 가져가면 동일한 가치의 금으로 교환을 보장해주는 방식(금본위제)로 화폐의 신용을 보장했지만, 화폐가 시장에서 충분히 신용을 얻고 나니 금본위제마저 폐지 수순을 밟았죠.
요컨데 화폐는 사람들의 신용을 잃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가장 다루기 편리하게 진화해 왔습니다. 내재 가치가 없는 화폐로 진화하게 된 까닭은, 화폐의 신용이 외부에서도 충분히 보장된다는 믿음을 국가가 사람들에게 갖게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국가 입장에선 이미 신용을 확보했는데, 화폐를 만드는 데 비싼 재료를 쓸 필요가 없죠. 화폐와 동일한 양의 금을 준비해야 하는 금본위제도 물론 번거롭고요. 그런 것 없이도 잘만 국가가 운영되는데요.
이런 과정을 거쳐 화폐의 발행은 국가의 고유 권한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국가 외에 개인이나 집단이 발행하는 ‘경쟁 화폐’는 국가가 만든 화폐보다 편의성이 떨어지거나, 신용이 낮기 때문에 시장 지배적인 입지를 차지하기 어렵게 됐죠.
가상자산이 가진 입지와 경쟁력은?
그렇다면 이런 ‘국가 화폐’들 사이에서 가상자산의 입지, 그리고 경쟁력은 어떨까요? 가상자산은 등장 당시 ‘국가가 발행하는 단일 화폐’의 지위를 위협하는 강력한 도전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가상자산이 등장한 지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편의성과 신용 양쪽 측면에서 기존 화폐와 경쟁하기 어렵다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가상자산 비관론에서 흔히 등장하곤 했던 ‘내재 가치가 없는 데이터 조각’이라는 비판과는 다르게, 실생활에서 가상자산이 화폐로 사용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편의성입니다. ‘화폐의 유일무이한 발행주체’임을 포기하기 어려운 국가의 견제는 제쳐두고서라도요.
이를테면 대면거래에서도 비트코인을 통한 결제를 진행하려면 10분에 달하는 전송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수수료도 발생하죠. 반면에 일상적인 화폐는? 내 손에서 상대방의 손으로 건네면 끝납니다. 어려운 절차가 필요하지 않죠.
대면 거래가 아닐 때에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이미 은행 전산망 등의 시스템이 잘 활성화되어 있는 상황에선, 클릭 몇 번이면 은행에서 송금이 가능합니다. 이는 비트코인을 전송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훨씬 빠릅니다.
다만 대면거래 이외에서의 장점은, 기존 화폐가 갖는 장점이라기보다는, 이미 확충된 인프라 등 ‘기득권’의 차이로 보는 게 타당합니다. 은행에 현금을 맡기듯 가상자산을 거래소에 맡기면, 기존의 화폐와 별 차이 없이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부분은 가상자산이 ‘현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요. 이를테면 기존 은행의 예금과 대출의 경우, 은행은 가지고 있는 현금(지급준비금) 이상의 돈을 빌려줄 수 있습니다. 이는 경제학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져 왔고, 실제로 경제 발전에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반면 가상자산은 현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실제로 개개의 이용자에의 지갑에 직접 코인을 빌려준다면 보유하고 있는 코인의 개수 이상을 빌려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코인의 개수는 탈중앙화된 시스템에 의해 정해져 있고, 임의로 줄이거나 늘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대의 경제적 장치들이 가상자산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가상자산은 여러가지 편의성 부문에서 기존 화폐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가상자산 자체가 가진 한계에서든, 기존 화폐의 ‘기득권’ 측면에서든, 실생활에 적용하기에는 불편함이 많죠.
화폐가 아닌 '가치 저장 수단'
다만 가상자산을 거래수단이 아닌 ‘가치 저장 수단’으로 봤을 때에는, 국가 화폐에 비해 갖는 강점이 존재합니다. 여전히 비트코인이 비싼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 등으로 국가가 위기 상황에 빠지면, ‘신뢰성’ 측면에서 가상자산이 기존 화폐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루블화의 가치가 급락하자 반대급부로 비트코인의 가격이 상승한 적 있죠.
각 국가의 화폐는 국가 시스템이 붕괴할 경우 가치를 담보할 수 없게 되지만, 가상자산은 극단적인 가정에서 대부분의 국가가 소멸 상태에 빠지더라도 존속할 수 있습니다. 신용을 잃은 화폐는 아무리 편리하더라도 가치가 없습니다.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처럼 화폐 가치가 붕괴해 오전과 오후의 물건 가격이 다른 상황이 오늘날 벌어진다면, 사람들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조금 더 가치가 안정적인 가상자산을 화폐로 삼아 거래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트코인이 점점 금과 같은 안전자산의 성격을 띄는 것도 국가가 보장하는 것과는 다른 성격의 ‘신용’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이 보장하는 화폐인 ‘달러’보다 신용이 높다는 의미는 아니며, 모든 가상자산이 비트코인과 동일한 수준의 신용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기에 ‘자산’으로서의 장점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구보다 큰 행성에서 대규모의 금광을 발견하고, 이를 채굴하게 되면서 인류에게 금이 아주 흔한 금속이 되는 경우 금의 가치는 가파르게 하락할 수 있습니다. 미국 달러는 통화 정책에 따른 공급량에 의해 가치가 변화할 수 있죠.
반면 비트코인의 경우 최대 채굴량이 정해져 있으므로, 이런 측면에서는 ‘가치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줍니다.
수많은 금속 중 하나인 금은 쉽게 부식되지 않고, 가공하기 쉬우며, 매장량이 적고, 나눌 수 있으면서도 무게당 가치가 높기 때문에 많은 문명에서 자연스럽게 화폐로 채택됐습니다. 그리고 오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치가 크게 변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용'을 얻었죠.
반면에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는 금화, 금본위제의 사례처럼 초기엔 '신용'을 금에 의존했다가, 점차 독립해 나갔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금 없이도 '국가가 발행하는 종이조각'을 믿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디지털 조각'은 어떻게 될까요?
기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하게 가치를 유지하고, 외부 요인(국가의 개입 등)을 제외한 가상자산 스스로의 한계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존재감은 시간에 따라 더 확대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