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가 미국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을 때 업계에서는 경제적 여건을 두고 많은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반도체 제조 비용만 놓고 보면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인건비와 건설 비용은 대만보다 훨씬 높고, 장비 설치와 운영 비용도 크게 증가합니다. 실제로 애리조나 공장은 설립 이후 몇 년 동안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순수한 사업성만 놓고 보면 TSMC가 미국에 공장을 지을 이유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투자가 진행된 배경에는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극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글로벌 IT 기업들이 가장 크게 느낀 위험은 공급망 리스크였습니다. 미·중 기술 경쟁이 심화되고 대만 해협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반도체 생산이 특정 지역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 새삼 주목받았죠.
특히 엔비디아 AI칩, 아이폰에 들어가는 애플 실리콘, 갤럭시를 포함한 대부분의 안드로이드 폰에 들어가는 퀄컴 칩 등 첨단 반도체 생산은 대부분 대만, 그것도 TSMC에 집중돼 있습니다. 만약 이 지역의 생산이 중단된다면 전 세계 IT 산업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습니다. 엔비디아와 인텔, AMD,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를 보유한 미국의 우려는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팬데믹 시기 공급망 불안을 겪은 이후 이런 문제는 더욱 현실적인 위험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미국에서는 대규모 산업 정책이 추진됐습니다. 반도체 공장과 첨단 제조업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리쇼어링’ 전략입니다. 바이든 정부는 보조금과 정책 지원을 통해 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했고, 트럼프 정부는 관세 부과를 무기로 기업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제조업을 자국으로 불러들인다는 정책의 방향은 같았습니다.
여기에 AI 산업이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미국에는 새로운 첨단 제조업 투자 흐름이 형성됐습니다. TSMC의 애리조나 공장을 비롯해 삼성전자의 텍사스 파운드리, 인텔의 오하이오 공장, 마이크론의 뉴욕 메모리 공장 등 수백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미국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단순한 제조업 부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이 집중하는 분야는 반도체와 배터리, 인공지능 인프라처럼 국가 전략과 직결된 산업입니다. 과거처럼 모든 제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핵심 기술 공급망을 안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무모해 보였던 이러한 정책은 촘촘한 글로벌 공급망으로 대표되던 ‘세계화’의 흐름에도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과거 글로벌 기업들은 가장 비용이 낮은 지역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전략을 택했지만 이제는 비용 이전에 국가 간 관계나 무력 충돌 가능성 같은 지정학적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경제적 여건’이라는 산업의 근본적인 기준을 ‘국가 안보’라는 더 강력한 요소가 뒤바꾸고 있는 셈입니다.
TSMC의 애리조나 공장은 이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읽힐 수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오랫동안 설계는 미국, 제조는 대만과 한국, 장비는 유럽, 소재는 일본으로 이어지는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구조는 서서히 재편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장 비용이 낮은 국가’는 더 이상 첨단 기업들이 선호하는 투자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지금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습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세계화를 주도하며 글로벌 공급망을 확장해 온 국가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은 오히려 그 구조를 스스로 흔드는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반도체 보조금 정책과 수출 규제, 관세 정책 등은 모두 기업들에게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라”는 신호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공급망 안정화’와 ‘국가 안보’를 내세우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첨단 산업의 생산 거점과 기술 생태계를 미국 중심으로 다시 묶어두는 효과를 낳고 있습니다. 공급망 리스크가 강조될수록 기업들은 비용보다 지정학적 안전성을 고려해 투자 결정을 내리게 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미국이 추진하는 ‘제조업 리턴’ 정책에도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반도체 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는 단순한 산업 정책의 변화라기보다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산업 구조 재편을 시도하는 과정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TSMC의 애리조나 공장 흑자 전환은 이러한 재편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