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게이머와 서브컬처 소비자들이 다른 점은, 게임 캐릭터를 내가 조작할 수 있는 ‘픽셀 쪼가리’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브컬처의 소비자들은 게임 캐릭터와 소위 ‘최애’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뿌리깊은 감정적 친밀감을 형성합니다.
전 세계 수많은 K팝 팬들이 자신의 ‘최애’ 아이돌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으로 여행을 올 정도의 열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서브컬처 게이머들은 한번 감정적인 친밀감을 형성한 캐릭터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퍼붙습니다. 캐릭터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캐릭터가 활동했던 무대의 모티브가 되는 실제 장소에 직접 찾아가기도 하죠. 서브컬처 게임의 ‘높은 부가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형성됩니다. 좋아하는 아이돌을 위해 똑같은 곡의 앨범을 수십 개씩 사는 K팝 팬들처럼, 서브컬처 게이머들의 소비는 때로는 합리성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넥슨의 ‘블루아카이브’, 시프트업의 ‘승리의 여신: 니케’, 호요버스의 ‘원신’ 등 글로벌 히트를 친 작품들은 하나같이 서브컬처 게이머들의 높은 감정적 친밀감, 유대를 이끌어낸 것이 특징입니다. 사실 이 게임들이 게임으로서의 재미 자체가 뛰어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아이돌의 인기가 노래 실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데요. 자신이 즐기는 게임을 "게임이 아닌 코드 덩어리"라고 자조하는 서브컬처 게이머의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브컬처 소비자와 게임 캐릭터 간의 친밀감은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요? 캐릭터의 그림으로부터 드러나는 매력적인 외모, 성우들의 연기, 스토리에서 보여주는 언행과 성격 등 많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하나의 캐릭터를 제대로 소비자에게 보여줄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은 캐릭터 디자인입니다. 일단 눈을 사로잡는 모습이여야 더 많은 사람들이 캐릭터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될 테니까요.
이 즈음에서, 한눈에 보고 ‘최애’가 된 캐릭터의 그림이, 알고 보니 AI 그림이었다는 걸 알게 된 서브컬처 게이머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더 알기 쉬운 예시를 든다면, ‘도자기 애호가’ 정도로 비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자기 애호가가 도예 전시회에서 한 눈에 마음에 든 찻잔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멋진 찻잔을 본 도자기 애호가는, 곧 잔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그 도자기가 만들어진 과정을 상상도 해 볼 겁니다. 숙련된 도공의 공들인 작업과 땀방울, 1000도가 넘는 가마에서 점점 선명해지는 유약의 색채… 같은 것들을요.
그런데 왠걸, 도자기 애호가가 자세히 보니, 찻잔 아래에는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AI그림을 본 서브컬처 게이머의 반응도 다를 게 없습니다. 서브컬처 분야에서 AI 그림을 사용했다고 대놓고 공개하는 게임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진실을 알게 된 게이머는 '속았다'는 느낌마저 받게 되죠.
일각에서는 "AI 그림은 게임업계의 현실적인 흐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서브컬처 분야에서 'AI로 그린 그림'이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도공이 공들여 만든 도자기’와 ‘공장에서 찍혀나오는 그릇’의 가격이 같다면, 어느 쪽에 지갑을 열지는 꽤나 분명해 보이거든요.
특히 수집형 서브컬처 게임에서, ‘창작자가 공들여 그린 캐릭터 일러스트'란 소비자들이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그 캐릭터를 구매하고 싶어 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할 수 있는 픽셀 그림이 막대한 게임사들에게 ‘고부가가치’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죠. 업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그 캐릭터를 이루는 요소를 창작해 냈으며, 그게 소비자의 눈에 매력적으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만일 눈에 보이는 그림의 품질이 비슷하더라도, ‘AI가 그린 그림’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서브컬처 소비자들은 이를 ‘공장에서 찍혀나오는 그릇’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게다가 ‘장인이 만든 도자기’와 동일한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면? 소비자들은 이를 불합리한 것으로 인식하겠죠.
사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AI 그림을 원화가가 그린 일러스트로 속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공장제 그릇을 전문 도공이 만든 도자기로 속여 판다면, 당연히 소비자들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요?
‘AI 그림’에 대한 서브컬처 게이머들의 분노는 일약 불합리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다른 시장과 다를 바 없는, 보편적인 감정과 반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