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벤 애플렉과 패리스 힐튼이 유명세만으로 선정된 것은 아닙니다.
애플렉은 영화 후반 작업에 AI를 활용하는 회사 인터포지티브를 설립했습니다. 창작자가 만든 콘텐츠를 바탕으로 AI 모델을 구축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후반 작업을 돕는 회사인데요. 타임에 따르면 이 회사는 지난 3월 넷플릭스에 5억8700만달러에 매각됐고, 애플렉은 넷플릭스의 선임 고문으로 합류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AI로부터 창작 노동과 인간의 역할을 보호하자는 단체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패리스 힐튼은 ‘딥페이크 반대 활동가’ 자격으로 명단에 올랐습니다. 동의 없이 제작·유포된 성적 이미지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게 하는 미국 연방 입법을 지지하고, 의회를 상대로 활동해왔다는 게 타임의 설명입니다.
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도 포함됐습니다. 그는 AI와 자동화가 대규모 일자리 감소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하며, 안전장치가 마련될 때까지 신규 AI 데이터센터 건설을 중단하자는 법안을 내놓은 인물입니다. 타임의 AI 100인은 연구자나 기업인만 뽑는 기술상이 아닌 겁니다. AI를 만들고 파는 사람뿐 아니라, AI가 일으킨 문제를 규제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선정 대상이죠.
실제로 올해 명단은 리더·혁신가·형성자·사상가 등 네 부문으로 나뉩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 일론 머스크, 앤스로픽의 다리오·다니엘라 아모데이처럼 익숙한 인물도 있지만, 창작자와 노동계 인사, 정치인, 시민운동가도 섞여 있습니다. 명단의 구성을 보면 영향력의 순위를 가리기보다, 그해 AI를 둘러싼 주요 장면을 100명의 얼굴로 보여주는 기획에 가깝습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인데
영향력보다 ‘새 얼굴’이 중요한 명단?
그렇다면 젠슨 황이 빠진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너무 유명하고 이미 여러 차례 선정됐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실제로 타임은 이번 명단을 소개하며 ‘AI 리더 커뮤니티에 새로 들어온 인물’을 강조했습니다. 선정진은 수개월 동안 올해의 핵심 이야기를 가장 잘 대표하고, 그 전개에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을 골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명단은 원래 교체 폭도 큽니다. 2024년에는 100명 가운데 91명이 전년도에 없던 인물이었고, 2025년에도 84명이 새 얼굴이었습니다. 매년 영향력의 누적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라기보다, 올해 새롭게 조명할 인물을 대거 넣는 구조라는 겁니다.
엔비디아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엔비디아에서는 황 대신 조시 파커 지속가능성 책임자만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의 프로필은 AI 데이터센터의 전력·물 사용과 탄소 배출 문제, 엔비디아의 에너지 효율화 작업을 함께 다룹니다.
브로드컴의 혹 탄, 마이크론의 산제이 메로트라, 중국 SMIC의 량멍쑹, 세레브라스의 앤드루 펠드먼 등 다른 반도체·인프라 기업 인사들도 선정됐고요. 하드웨어 업계를 아예 무시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논란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습니다. 타임이 발표한 건 ‘올해 처음 주목할 AI 인물 100명’이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AI 인물 100명’이니까요. 엔비디아의 칩 없이 최첨단 AI 모델을 만들기 어려운 현실은 지난해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타임도 황을 제외한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타임은 지난해 12월 황과 수를 ‘AI의 설계자들’로 불렀습니다. AI가 경제를 움직이고 지정학을 바꾸는 과정의 중심에 두 사람을 세운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죠. 이번 누락을 놓고 “선정 기준이 대체 뭐냐"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결국 황이 영향력을 잃어서 탈락했다기보다, 타임이 명단의 새로움과 올해의 쟁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미 충분히 조명한 인물을 비운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새 얼굴’을 우선하면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간판을 그대로 단 순간, 타임은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젠슨 황보다 패리스 힐튼이 AI에 정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느냐고요.